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를 다스리는 대안에 대하여

이미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사진이나 영상은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처음으로 사진을 발명한 후 50년쯤 지난 1880년대에 그 유명한 코닥 회사가 세워졌다. 사진을 처음 접하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상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복음 역시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기적 이상의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세상을 보는 관점 즉 마음보다. 기독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본성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입으로 시인할 때 갖게 되는 영성의 두 가지 본성을 갖는다. 일상생활을 할때 육신은 죄성과 약함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려 하고,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본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신성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본성은 자신에게 집착한다. 자기본위의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적대시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며 성경은 그것을 부패한 본성이라고 지목하고 본성에 따른 육적인 삶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의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고, 영혼의 괴멸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친 많은 거짓된 내용을 삶의 정석이나 진리로 알고 살아간다. 남을 따라 살면서 어떤 인생이 잘사는 인생이라는 식의 획일적 선전 즉 거짓에 기반한 판단과 생각 때문에 불행하고 불만족스럽고 혼동된 채 살아간다. 그 거짓의 내용은 이 세상에 속한 영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더 많이 소유하고자 욕망한다. 불행하게도 욕망은 끝이 없다. 참 기독교인의 삶은 그래서 마음 속에 영적인 전쟁터를 둔 삶이다.     신약성경 27권중 무려 13권을 쓴 바울사도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하지 않는 생각을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치할 수는 있다.     신학자인 닐 앤더슨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오래된 불손한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중단시킬 수는 없다. 분명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사람이 거짓의 아비, (사탄)를 극복하는 것은 진리를 선택할 때뿐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의 영은 죽을 몸과는 달리 살아있게 되고, 영에 의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수 있는 세가지 단계로, “내게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으며 삶을 축하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할 때 의미가 있다. 그것이 교회와 일상이 조화되는 신앙생활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유지한 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며,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은 마음속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때만 건전하고 깨어있는 신앙이 된다.     19세기인들과는 달리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간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와 영상을 생시처럼 생생히 다시볼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처럼, 기독교인은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은혜다. 아이큐에 상관없이 은혜를 사모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 대안 예수 그리스도 종려나무교회 목사 생각 때문

2021-12-17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감사, 참감사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여행이나 수련회를 떠나는 가방 안에 감사카드를 몇 장 챙겨 넣게 했다. 감사는 느낌이 아니라 행동이며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사 없이는 행복할 수 없고 진실한 믿음을 위해서도 감사는 필수적이다. 예수는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았을 때 그 답으로 열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하셨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에서 추방되던 병이었다. 문둥병자는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아야만 정상생활로 복귀가 가능했으므로, 예수는 그들이 깨끗해졌다고 선포한 후 제사장에게 가서 치유된 것을 확인 받게 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가 한 말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치유되었다. ‘순종이 믿음의 시작이다’는 메시지다. 열명의 문둥병자들의 피부가 깨끗해졌다고 할 때의 그리스어는 영어의 카타르시스의 어원인 카싸리조(katharizo)로 육신적인 병이 치료된 것을 의미한다. 열명의 문둥병자들 모두 감사를 느꼈을 터지만, 막상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예수는 그 한 사람에게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는가고 물은 후에 “일어나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누가복음(17:19)절을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인 유진 피터슨 목사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고 너를 구원하였다”고 번역했다. 예수가 그 한 사람에게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할 때의 동사는 소조(sozo)로 영적인 질병과 죽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다. 안팎이 다 치유되지 않고도 병은 나을 수 있다.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현 시대의 대부분의 교인들의 상태를 대변한다.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육신의 병을 치유 받는 것으로 그쳤지만, 감사하기 위해 예수께 돌아왔던 한 사람의 문둥병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구원, 즉 영생을 약속받았다. 예수는 이 땅에서 단지 몇 년 더 살게 하는 육신의 질병치료가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온전해지도록 치유해주는 분이다. 참 감사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감사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늘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해 주어진 내용이다.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감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사람이 되며, 감사하는 사람이 더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마틴 루터가 참 예배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열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감사를 표현하러 돌아온 그 한 명이라고 답했다. 참된 예배를 잘 표현한 한 단어는 바로 감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마치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처럼 이 세상의 삶과 오직 보이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문제를 해결 받고 나아지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나 하나님께 감사함을 망각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암이 치유 받고, 기적적인 문제 해결과 은혜 받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태도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목격해 왔다. 몸담았던 교회를 비방하고 불만하며 교회를 이리저리 전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베풀고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채, 자기 맘에 드는 찬양대, 설교,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차없이 교회를 바꾼다. 감사보다는 짜증이 많고, 까탈스럽고, 무책임하다. 병명 진단을 받았대서 병이 치료되지는 않는 것처럼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인은 아니다. 감사 결여의 상태는 거듭나지 않고 혼동된 사람들의 특징이다. 죄를 탕감 받고 구원 받은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교회, 목사, 교우 등 주와 관련된 모든 내용에 경박한 말을 삼가고, 감사가 허물을 덮는 태도일 때 정상적인 신앙인이다.   감사는 일회성 감정이 아니며 참감사라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된 관계를 통해 지속될 것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감사 종려나무교회 목사 아홉명의 문둥병자들 감사 결여

2021-11-19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능력에 대하여

능력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나 지식으로 정의된다. 지력, 영력, 체력, 재력 등 그 종류나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나이와 함께 차별화된 능력을 생각한다. 한 예로, 굽 높은 하이힐을 신는 것은 능력일까? 10센티미터나 되는 뾰족구두를 신고 반듯하고 당당하게 걷는 것은 분명 건강한 신체와 자존감을 보여주는 능력일 것이다. 능력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은 길거나 짧게 훈련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굴욕이나 수모를 견뎌내고 억울함이나 오해를 감당하는 것, 화를 다스리는 것, 죄책감을 직시하고 치리하는 것은 분별력 있고 판단력 있고 성숙한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자질이자 능력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지 즉 선택의 자유는 은총이지만 생각 없이 쓰거나 악을 행하는데 사용된다면 저주가 되는 위험한 내용이다.     여러 책을 출간한 저자이자 정신과의사인 엠 스캇 펙은 사람이 일련의 선택을 하는 동안에 점차 악인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백한 이유가 없이도 자기들이 원해서 악을 선택하고 악인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참을성의 부족이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자신의 잘못을 몰라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감정을 참고 견뎌내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즉 죄책감을 감당하는 능력이 낮은 사람은 악인이 되기 쉽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죄책감을 들게 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증오심을 표출한다. 자기들의 처지나 잘못을 알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자기 때문에 손해를 입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공격을 한다.     교회에 분쟁이 많은 이유도 그런 악의 존재 때문이다. 목사를 미워하는 교인들이 한번쯤은 스스로를 꼼꼼하게 살펴보아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희랍인들, 예수를 죽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가졌던 증오심의 뿌리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은 제거하고자 하는 죄성과 악에 닿아있다.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교만이다.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직시하는 대신에 그것을 알고 있거나 일깨워주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악이다. 따라서 교만은 악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첫번째 그리고 가장 심각한 죄성은 교만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그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나, 무능력이나, 실책 또는 나쁜 성질에서 기인된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강한 의지로 독자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도외시한 채,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이며,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화를 부른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접근할 때 썼던 전략은 그녀의 교만심을 부추기는데 있었다. 시 에스 루이스는 “세상에는 크게 오직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한 부류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부류는, “너희 뜻대로 될지어다(네 멋대로 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사람들이다고 했다.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므로, 예수조차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자기 주장이 강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묵살해서 그 사람의 내적 성장을 방해하고 삶의 열정을 소멸케 한다면, 그 사람은 악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악은 내적 불편함을 참아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속성이다.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능력이다. 하이힐을 신는 것 또한 불편함을 견디는 훈련이자 걸음에 실어 전하는 중력에 대한 항거의 메시지다. 하여, 하이힐을 신는 것은 분명코 능력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능력 종려나무교회 목사 희랍인들 예수 내적 불편함

2021-11-05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사색의 계절에~

찬기운이 목덜미에 서늘하게 감겨오고 엷어진 햇살이 멀건 풀대죽 빛깔로 사위어 내리는 가을 하루는 늘 아쉬움과 함께 저문다. 허공을 휘돌아 날리는 낙엽을 보는 순간이면 누구나 시인의 감성을, 예술가의 성정을, 그리고 철학자의 사색을 공감할 터이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여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 사색의 정의다. 소크라테스는 “점검되지 않은 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인생을 점검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얼굴 없는 사람들이 말했음직한 성공의 기준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질시의 항목이기도 하다.     19세기 구한말 의사였던 이제마는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은 지혜로운 자를 미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투현 질능”에 있다고 했다. 탈무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천사가 방문해서 그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의 이웃은 그가 성취하는 것의 두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해주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심상에 원하는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리라. 마침내 그가 천사에게 말했다: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주실래요?” 천사는 큰 한숨을 쉬었고, 그의 원대로 이루어졌다. 자기의 삶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웃의 인생을 먼저 헤아리고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     질시의 태도를 갖고 남을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을 더 눈여겨 본다. 울타리 안 자신의 삶을 다독이기보다는 남의 집 담장 안을 기웃거리며 남의 일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고, 자신처럼 남들도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실상보다 보여지는 허상이 더 중하고, 삶의 중심은 장대로 받쳐들린 물고기 부레처럼 허공에 둥둥 떠있기에, 나이를 먹어도 성년이 안된 사춘기 아이들처럼 안팎으로 부산한 채 무엇에도 헌신하지 않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불평은 성경에도 나온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와있는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하루 품삯을 일꾼들과 약속하고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했다. 그 후 9시, 12시, 3시, 그리고 일이 끝나기 1 시간 전에도 일꾼을 불러와서 일하게 한 후, 청지기를 시켜서 나중 온 자부터 처음 온 자 순서로 일당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모두 똑같이 하루 품삯을 받게 하였다. 일찍 일을 하기 시작했던 자들이 더 받을 줄 기대했다가 실망하여 주인을 원망하자, 주인의 응대가 이랬다: “내 것으로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후한 것을 네가 시기하느냐?” 포도원 일꾼들은 약속대로 받은 자기 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은 후한 요금 때문에 불만했다. 재밌는 현상의 하나는, 이 성경구절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자신들을 하루가 다 저물 때 고용된 일꾼이 아니고 온 종일 일한 일꾼들과 일치시키고, 그들의 불평에 쉽게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포도원의 일부 일꾼들처럼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 어떤이는 건강을 잃은 후에, 어떤 이들은 불편한 처지에 대해, 또 다른 이들은 가진 것이 부족하다며,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혹은 경기가 나쁘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보다 더 가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대가 없이 누리고 산 것들이 헤아려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사색의 계절에 무엇보다도 문신처럼 새겨진 인류의 병, 질시의 지병이 진단되고 치유 받게 되기를. 남이 아닌 자신의 인생에 촛점을 맞추고, 자유하며 나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사색 계절 포도원 일꾼들 일부 일꾼들 종려나무교회 목사

2021-10-22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교회의 성전은 주님이 성령으로 자리하신 곳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하늘문이 열린 곳이다. 영적인 영역을 인정하고 영적인 전쟁에 대비하고 사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원하는 것을 자각하여 근신하고 절제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그리고 삶의 향방까지도 독자적인 판단 이전에 자기 존재와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해드린 주님이 인도하는대로 나아가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인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당연히 마음의 갈등이 더 민감하게 감지되고 그때마다 결단이 요구되는 신앙생활은 그럼으로 용기와 의리가 없이는 가능치 않다.     신앙 여정은 결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이 아닌 교회내의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어서 교회에만 출석하면 교인이 되는 현실에서 몇몇 교인들을 보고 기독교 신앙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신앙인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먼저 감사하며 주께 의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십수년 전 교회를 개척한다고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이해나 지지를 얻기도 어려웠다.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일이며 칭찬보다는 욕을 먹고 도마 위에 올린 생선토막처럼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이다고 점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새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사람이 만말을 하며 개척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주께서 사명을 주셨으면 그 가는 길에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 소명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온 나라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던 골리앗에 맞선 단아한 미소년 다윗이 멋진 말을 외쳤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개척사역은 아무 자원 없이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수년간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해온 목사님의 이름을 듣고, 자청하여 그 분을 만났다. 우리 성전에서 교회를 시작하도록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조건 없는 제안에 한 가정 성도를 두고 기도하고 있던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받아들였다. 젊은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면서 주께서 종려나무교회를 기억하시고, 그 사역자인 내게 감동을 주셔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기도문을 위한 문구가 아니고 진정한 고백이어야 한다.     설립예배를 하는 축사에서 진심으로 전한 개척교회 선배로서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내 믿음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가 그 동안 꿈꾸며 기도한 사역의 내용들을 이미 성취된 것과 똑같은 기쁨으로 받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으로 하는 평가는 앞으로도 아무 의미도 없음이다. 격려하기 위해 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서다. 목회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상황에서나 기대감이 생겨나고 부동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 지붕 두가족 살림이 쉬운 일만은 아닐지 모르나, “형제의 연합하고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본이 되는 사역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종려나무교회와 새소망교회의 찬송과 기도가 함께 주의 보좌에 상달되어 주를 기쁘게 하는 두 교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Kevin Rho

2021-10-15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